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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교권이 무너지면 신학도 무너진다 [1]

해방후 남부총회의 교권과 교단신학의 자유주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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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기사입력 2013-04-21 [22:11]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는 100년이란 역사가 이어져왔다.
   선배들의 정통보수신학, 개혁신학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한 그 열정과 헌신은
   오늘의 거대한 교단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본 교단은 이러한 역사적인 정통성과 교단의 신학적 입장과
   정체성을 상실한체 혼란이 거듭되고 있다.
   이제 본 교단의 역사적인 개혁신학은 한물간 고리타분한 박제된 신학으로 
   평가절하 하며 오직 복음주의를 내걸고 교단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
   예장합동 교단, 이제 머지않는 장래에 정통신학과 역사적인 개혁신학은
   무너질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이제 제98회 총회는 교단의 교권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
   그 이유는 교권이 바르게 살아있을 때 신학과 신앙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리폼드뉴스>는 과거 한국장로교회 역사를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함께 고민해 보기를 원한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조선신학교는 광복 후 미 군정청으로부터 학교인가를 받았다. 1946년에 남부대회(제32회 총회)에 의해 장로교단 직영신학교로 인정을 받았고, 1947년에 대학인가를 받았다. 조선신학교는 1951년에 한국신학대학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 조선신학교 교수와 학생일동(1946년)    ©리폼드뉴스 자료실 



 
 
 
 
 
 
 
 
  
조선신학교 안에는 선교사 반대운동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선교사들이 가르치고 있는 보수신학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조선신학교의 설립은 반선교사 사상 세력들이 결집 되어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인에 의한 신학교육의 주체성을 방해했다고 하는 선언으로 출발하면서 일본인 교수, 강사, 이사를 모시고 정통주의 신학 시대를 마감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으로 자리 잡은 정통신학을 정통적 이단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 전체가 전 세계 기독교회와 함께 본류에서 저어갈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시작하였다. 자연스럽게 조선신학교는 보수신학에서 벗어난 신학교로서 설립자들이나 교수들은 조선교회가 선교사로부터 교육권을 이양 받아서 자주적으로 또 자립적으로 신학교육을 할 때가 온 것이라 생각했다.

▲김재준 박사 © 리폼드뉴스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출발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여 마침내 자유주의 신학의 확립을 달성하였다. 조선신학교는 시작부터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김양선의 기록을 보자: “김재준 교수에 의하여 지도되는 조선신학교는 한국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을 수립한 기반이요 자체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신학교의 설립은 김재준 교수의 말과 같은 한국교회의 신출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한국교회 사상에 지위를 점케 되는 역사적 전환기를 만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재준은 “선교사 집권시대는 지났다”라고 말함으로써 선교사 중심의 평양신학교가 취한 보수신학의 철회를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대로 실행하였다. 김재준이 이렇게 대담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뒷받침 해 주었던 일정한 교권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신학교는 오랫동안 서북지역의 교회 지도자들과 친분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당시 교계 교권은 평양신학교와 서북지역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비 서북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견제를 받아왔다. 소외되었던 비 서북권, 특히 함경도와 호남 출신 일부 지도자들의 지역 주의적 정서와 서북지역 교회 지도자들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그들은 함경도 출신인 김재준과 연합하여 조선신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지원 했다.

특히 함경도는 캐나다 선교부의 선교지역으로써 캐나다 연합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의 자유주의적인 성분으로 인하여 다른 지역에 비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이 타 지역에 비하여 일찍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 지역 출신인 김재준과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그와 동정적으로, 신학적으로 함께 했다. 훗날 1953년 기독교장로회가 분열해 나갈 때 김재준과 뜻을 같이한 함경도 및 호남 특히 군산, 목포지역 목회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해방 후 송창근, 김관식, 김영주 목사 등이 교단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부총회는 조선신학교의 총회 인준을 아무런 검토나 이의 없이 채택해 주었기에 여기에 힘을 얻은 김재준은 보수신학에 반한 자신의 자유주의 신학을 조선신학교에서 실현하였다. 만일 남부총회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인사들이 보수주의 신학자들이었다고 한다면 조선신학교는 총회로부터 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는데 실패하였을 것이다.
 
해방직후이기 때문에 망명에서 돌아온 보수신학자들이나 신사참배 거부로 갇혀 지냈다가 출옥한 목회자들이 있었지만 아직 남부총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시 총회는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신사참배한 교권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조선신학교 김재준의 보수신학에 대한 비난과 그로 인해 총회 내 기류가 보수신학에서 자유주의신학으로 전환되자 기존의 보수신학의 추종자들은 이를 그냥 묵과할 수는 없었다. 자유주의 신학 중심의 교육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유주의 신학에 관해서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신학교는 각 선교부에 신학교 이사와 교수 파견을 요청하여 선교사의 협력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선교회 이외에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북장로교 선교회에서는 아직 정식으로 관여할 시기가 아님으로 회답을 보류한다는 반응이었고, 남장로교 선교회에서는 현 교수진의 총 퇴진을 요구하는 회신을 보냈다.

▲ 필자(소재열 목사)의 한국장로교회사 철학박사학위 논문의 지도교수님이셨던 김의환 박사님의 친필   © 리폼드뉴스

 
 
 
 
 
 
 
 
 
 
 
 
 그 가운데서도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적 신학교육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 의사와 경계를 보인 선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였다. 남장로교 선교회에서는 조선신학교가 순정통적 성경해석과 신학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고 판단하여, 당시의 교수들을 총 퇴진 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에 조선신학교는 “정통적인 성경 해석이나 정통적인 신학을 무시한 일이 전연 없었으니 그 점에 대하여는 기우(杞憂)를 가질 필요가 없으며, 동시에 그 문제 때문에 교수의 총 퇴진과 같은 것이 강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회신하였고 이로 인하여 “남장로교 선교회와는 완전히 분열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직후 한국장로교회는 1901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의 보수신학에 대한 역사적 전통이 계승되지 못하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교계와 신학교를 지배하고 있었다. 1946년 6월 12일부터 4일간 서울 승동교회에서 남부총회(회장 배은희 목사)가 소집되었다. 남한교회만의 총회였기 때문에 남부총회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남부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인준한 것은 자유주의 신학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것을 용인한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신학교를 정확히 살피지 않고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한 사실에 관해 김양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부총회는 재건복구되는 교회를 위한 교역자 양성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나머지 신학사상문제라든지, 경영에 관한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지 않고 조선신학교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 총회의 직영 신학교로 만들었기 때문에 후에 여러 가지 난문제가 발생하였다.”

해방 후 신학사상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교회 재건에만 관심을 갖다보니 남부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결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준다. 신학적 입장이나 한국장로교회의 보수신학의 계승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정치적 교권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오늘날 우리 교계의 현실과도 너무 흡사하다.

당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내 최대 노회였던 경기노회는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이었던 전 평양신학교에 대치하자는 의견에 일치”되고 있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적인 신학사상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출옥성도들과 국외 망명성도들의 출현을 보지 못하였고, 선교사들도 그 태도가 신중하여 교회 내정에 전연 간섭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 잔존 지도자들로서는 수원수구(誰怨誰咎)할 것 없이 해방의 기쁨을 함께 즐기며 무조건 함께 뭉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로는 평양신학의 정통성을 이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한 한상동을 비롯한 보수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남부총회 직영신학교가 아닌 다른 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김재준 교수가 고등비평을 인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요, 장로교의 근본교리인 예정론에 대하여 전연 흥미를 가지지 않는 알미니즘 경향의 신학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신학교 대치론에 대하여는 반대의견을 가졌고, 장로회신학교 신설론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신학교가 고려신학교와 남산 장로회신학교였다.

소재열 목사 / 한국장로교회사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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