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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분열사 4] 고신측의 분열에 대한 정치적 배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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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기사입력 2015-02-09 [15:50]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취임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한국장로회 제1차, 고신측 분열은 “신앙적인 문제와 교권주의 문제, 교회 정치적인 문제 등이 복합”되어 나타났으며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교권주의에 의한 분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분열의 정치적인 배경이 된 경남노회의 법통 시비와 경남노회 내 김길창 목사와 한상동 목사간의 정치적 갈등이었다.
 
첫째, 경남노회의 고려신학교 인준과 인가취소
 
1946년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고려신학교을 개교한 상황에서 1946년 12월 3일 진주 본래교회에서 소집된 제48회 경남노회 정기회에서 김길창 목사가 노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때 47회 임시회(1946. 7)에서 인가한 고려신학교를 노회가 인가 취소결정을 하면서 신학생을 추천하는 일도 함께 취소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제48회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자인 김길창 목사가 경남노회 노회장으로 당선되자 한상동 목사는 분개하여 노회를 탈퇴하였다. 목사의 소속은 노회에 있다. 노회를 탈퇴한다는 것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장로회 규칙으로 보면 목사가 노회를 탈퇴한 행위는 자신의 목사 근거지인 노회를 탈퇴하는 것으로 치리의 대상이 된다.
 
한상동 목사의 탈퇴선언은 마침내 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켜, 경남노회는 이 중대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1947년 3월 10일 구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노회장 김길창 이하 전임원의 권고사직을 단행했다.
 
둘째, 한상동 목사의 노회 탈퇴선언 취소와 고려신학교 인준
 
1947년 12월 9일 경남노회 제49회 정기회가 소집되어 한상동 목사 노회 탈퇴취소와 고려신학교을 인준하기로 재 가결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해인 1948년 5월 박형룡 박사의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박형룡 박사는 총회가 지난 5월 27일에 부산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사임하여 서울에 상경하였다. 고신측에서는 “박형룡 박사가 고신을 이탈하여 서울로 가서 중도 복음주의자들의 주선으로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라고 기록한다. “박형룡 박사가 고신을 이탈한 것”으로 보고 있다.
 
셋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4회 총회(1948)의 고려신학교 결별
 
고려신학교가 계속 총회 산하 경남노회 소속으로 있으면서 총회의 승인과 그 소속을 거부했다. 제34회 총회에서 “총회에 전남 순천노회로부터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좋으냐”라는 질의에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당연히 총회 산하 지교회가 고려신학교 입학지원자에게는 천서를 주지 않기로 하는 것은 지극히 원칙적인 법리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신학교측에서는 한결같이 그 이유를 오로지 교권, 신사참배 문제와 결부시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킨다.
 
넷째, 제34회 총회(1948) 뿐만 아니라 경남노회도 고려신학교 결별
 
제34회 총회(1948.4. 20-23)에서 “고려신학교 입학지원자에게는 천서를 주지 않기로 한”총회 결정 이후 1948년 9월 21일 김길창 목사 시무하는 항서교회에서 경남노회 제49회 임시노회(1948년 9월 21일) 제49회 경남노회 정기회(1947. 12. 9)에서 44대 21로 고려신학교는 법적으로 경남노회와 상관없음을 결의하였다. 경남노회 제50회 정기회(1948. 12. 7)가 마산 문창교회에서 소집되어 개회되었다. 이때 고려신학교 인정취소를 재확인하는 노회가 되었다.
 
김길창 목사는 1949년 2월 19일에 경남노회 제51회(1949. 3. 8)을 앞두고 새로운 노회 조직을 위한 소집통지를 1949년 2월 19일에 소집통지서를 김길창 목사 측인 권남선 목사의 발기인 대표 이름으로 발송하였다. 1949년 3월 8일 제51회 경남노회는 김길창 목사의 새로운 노회가 부산 항서교회에서 소집되었고, 마산 문창교회에서 한상동 목사 측의 기존 노회가 같은 날 1949년 3월 8일에 소집되어 개회되었다.
 
분열의 시작은 이미 고려신학교를 총회의 승인을 받는 문제에서부터 분열이 시작되었고 잉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총회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총회 승인 받는 문제는 시기가 아직 아니라는 인식의 차이점이 곧 분열의 시작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회(1949. 4. 23)가 개회되자 정치부장 이자익 목사는 “경남노회 사건은 노회는 한부선파와 관계하지 말고 고려신학교에도 거년 총회결정대로 노회가 관계를 가지게 되는 일은 총회결의에 위반되는 일이오며 삼감이 마땅하오며 기타의 모든 복잡한 문제만은 전권위원 오명을 선정하여 심사처리”케 했다.
 
경남노회 전권위원회는 1949년 4월 27일 자로 3개 노회(경남노회-부산지방, 경중노회-마산, 통영지방, 경서노회-진주, 거창지방)로 분립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각 노회 소집책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고신측에서는 “소집 책임을 위임받은 세 분은 모두 김길창과 관계를 맺어 온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면서 “전권위원회는 김길창에세 힘을 실어주어 그의 세력이 경남에서 주도권을 갖게 하고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편을 거세하려는 책략”을 가졌다고 평가하면서 “이로써 이들은 실상 분열을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더욱 조장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총회가 위임한 전권을 한상동 목사 측에서는 반대하여 총회가 분립한 3개 노회와 구별하여 경남(법통)노회라 하여 실제적으로 경남노회는 4개 노회와 부산진교회당에서(1949.9.27) 중도파 노진현 목사 중심의 경남노회가 출범하여 모두 5개 노회가 존재하게 되었다. 물론 총회가 허락한 노회는 경남노회일 뿐이다. 분명 사고노회일 수 밖에 없다. 경남노회 안에서의 이 같은 분열은 곧 총회 분열의 도화선에 불이 점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전공,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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