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전남노회 신사참배와 회개, 일본인 여자부흥강사와 정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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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기사입력 2020-10-13 [16:45]

 

▲ 제27회 총회(1938년) 임원들이 총회를 마치고 신사참배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기사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1938년 9월 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직전 총회장 이문주 목사의 사회로 평양서문밖교회에서 회집되었다. 개회 예배는 홍택기 목사가 대표기도를 했으며, 성경봉독은 김길창 목사가 맡았다. 본문 고전 13장을 봉독한 후 ‘신앙생활의 심대 요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서기가 회원을 점검하니 총 27개 노회, 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 합계 193명의 출석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개회를 선언했다. 개회를 선언한 후 회장은 제27회 총회를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장소를 변경한 것에 대해 설명했다.

 

제27회 총회 임원을 선거하니 총회장에 홍택기 목사, 부회장에 김길창 목사, 서기 곽진근 목사였다. 총회는 평안남도 도지사 석전천태랑의 축사가 있은 후 평양 장대현교회 여전도회에서 회원 휘장을 제정하매 분배하고 서기로 감사장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경건회를 마친 다음 회순에 따라 공천부 보고를 한 후 곧바로 평양, 평서, 안주 삼노회 연합대표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 결의 급 성명서 발표의 제안건은 채용하기로 가결했다.

 

제27회 총회장인 홍택기 목사는 삼노회의 안건을 상정하고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채 신사는 종교기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배하지 않는다며 참배의 정당성에 대한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채택한 신사참배 가결이다.

 

이같은 결의를 한 후 총회 본회는 곧바로 신사참배 결의안을 조선 총독, 총감, 경무국장, 학무국장, 조선군사령관, 총리대신, 척무대신, 제 각하에게 전보를 발송하기로 가결했다. 신사참배 가결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제27회 회의록에는 전남노회가 자랑스럽게 다음과 같이 전남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금춘 정기노회[1938년 봄]에 오래동안 문젤 되어오든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참배는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의식 임을 인식하고 본 노회로서는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 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 교회에 통지하여 일반 교인으로 취할 길을 보였사오며(제27회 회의록, 1938. 9. 9.).

 

  © 리폼드뉴스

1942년은 전남노회 제35회였다. 그러나 1943-1944년까지 전남노회는 폐쇄되었고 1945년 11월 7일에 복구되었다. 1945년의 복구노회를 1942년 34회를 승계하여 35회 노회로 하여 계승하였다. 1945년 전남노회 제35회 노회 회장은 김창국 목사. 부회장에 이남규 목사, 서기에 성갑식 목사, 부서기에 김병두 목사, 회계에 선한권 장로 부회계에 서영범 장로 등이 선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해 11월 7일에 전남노회 제35회 정기회로 소집하여 광주부 금정교회당에서 전남교구를 폐쇄하고 전남노회를 복구하는 정기회가 소집되었다. 1942부터 전남노회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창씨 개념을 하였으므로 당시 전남노회나 전남교구 회의록에는 창씨 개명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방 후 전남노회를 다시 복구하는 제35회 노회에는 창씨 개명이 사라지고 원래의 이름으로 회복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날 모인 목사회원은 19명이었으며, 장로 총대는 15명으로 총 34명이 출석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 제35회 회의록에 기록된 개회예배는 : 1945년 11월 7일 오후 3시에 조선 기독교 장로회 전남노회 제35회가 광주 금정교회당에 회집하여 찬송가 제32장을 백영흠 목사로 인도 합창하고 김창국 목사 조두현 장로 양인으로 기도한 후 회장이 성경 누가 13장 6-9까지 봉독하고 찬송가 제135장을 합창하고 김방호 목사로 기도하고 개회예배를 마치다.

 

개회 예배는 다음과 같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에 대한 본문 말씀이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교회가 영욕의 세월을 보내면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신사참배 등으로 인하여 많은 환난과 고통을 당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온갖 고초를 당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조선 교회의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일제의 패망으로 인한 일제 강점기의 교회 탄압과 교회의 거룩성이 무너지는 상징적인 사건인 전남교구의 흔적들은 해방 이후에 전남지역 교회들의 거룩성 회복은 시급한 문제였다. 이런 역사의 어두운 상황 속에서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라는 누가복음의 말씀은 모든 목회자들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하고도 남았다.

 

개회예배에 이어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주님이 분부하신 성찬예식이 진행되었다. 집례자는 김윤식 목사였다. 해방이후 전남교구를 해체하고 전남노회를 복구하면서 진행된 성찬식은 더욱 간절했다.

 

당시 현장 상황에 대한 회의록에는 : “김윤식 목사가 성경 요한 1서 1장 8-9까지 봉독하고 기도한 후 ‘우리 죄를 자백하자’ 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일동이 참회 기도하고 찬송가 제89장을 합창하고 목사 중 1인 장로 중 1인 방청 전도사 중 1인으로 기도하게 한 후에 성경 고린도전서 11장 23-34까지 봉독하고 기도하고 나서 장로 중 2인으로 분병케 하고 백영흠 목사가 기도하고 분잔한 후 찬송가 제133장을 합창하고 김윤식 목사의 축도로 성찬식을 마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윤식 목사는 성경 요한일서 1:8-9절 말씀을 본문으로 삼았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봉독한 후 ‘우리 죄를 자백하자’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일동이 ‘참회 기도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35회 전남노회 회의록 © 리폼드뉴스

이같은 참회 기도와 죄에 대한 자백은 비단 전남노회만의 일이 아니었다. 당시 경북 안동을 지역으로 하는 경안노회의 복구노회(1945년 11월 20일)에 의하면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시던 하나님께서 조선 백성을 사랑하시사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인도하셨도다. 일본 제국주의하 강력한 탄압을 받아 1943년으로부터 1945년까지 3개 성상이나 교구회에 속하였던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 제39회 복구회가 1945년 11월 20일 하오 7시에 안동읍 법상동 예배당에서 회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복구노회인 제35회 전남노회의 소집과 개회선언을 위하여 전남교구회로 소집하였다. 오후 3시에 개회된 정기회는 개회예배와 성찬식을 마치자 오후 5시가 되었다. 5시에 정회하고 저녁 8시에 “본 교구회가 동장소에 계속 회집하야 찬송가 제149장을 합창하고 원창권 목사로 기도하고 서기가 전원을 점명한 후 회장이 조선기독교 전남교구회가 개회됨을 선언”하였다. 전남교구 개회를 선언하고 난 직후 전남교구 해산하는 선언을 하였다. : “해산 선언 ; 교구장 조승제 목사가 조선기독교 전남교구회가 해산됨을 정식으로 선언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승제 목사는 전남교구장이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전남노회가 해산되고 대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과 전남교구로 조직되면서 모든 교회가 이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조국 해방과 더불어 이제 더 이상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과 전남교구를 계속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전남교구를 해산하고 전남노회가 다시 복구되는 역사의 찬란한 축복이 이어졌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70년 동안의 때가 차매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것과 같은 축복이었다. 노회 회의록은 : “노회 개회 : 조선기독교 장로회 전남노회가 제35회 개회됨을 선언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42년을 끝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해산되고 대신 일제가 모든 교회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편입시켜버렸다. 각 노회 역시 폐쇄되고 교구제도로 전환되었다. 회의록은 이를 전남교구 제1회이다((소화 18년 5월 6일). 그러나 회의록은 조선야소교장로회 전남노회 제34회 회의록으로 기록되고 있다.

 

1942년 전남노회 제34회가 진행된 후 1943년 5월 6일은 전남노회 제35회가 된다. 그러나 제35회는 전남교구 제1회가 되고 1945년 11월 7일 정기회를 전남노회 제35회로 기록하고 있다. 이날 전남교구 폐쇄와 전남노회 복구결의가 있었다. 전남노회 제34회(1942년 5월 4일)를 잇는 정통성은 제35회 노회(1945년 11월 7일)로 확정함으로 전남노회 교구(제1회 1943. 5. 6., 제2회 1944. 5. 3., 제3회 1945. 4. 17.)를 전남노회의 역사적 정통성에서 삭제하고 있다(소재열 지음, 전남교구에 대한 역사적 고찰, 근간 참조.).

 

앞줄 중앙이 모리후지 여사(함평읍교회 부흥회를 마치고)  © 리폼드뉴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신사참배한 전남노회나 신사참배를 극찬한 전남교구에서 나주 남평교회는 탈퇴하였다. 영남지역이 아닌 전남지역에서 강력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회가 바로 나주 나주남평교회이다. 강순명 전도사가 1937년에 부임하여 강도사로 1939년까지 남평교회에서 목회했다. 남평교회는 전남노회가 폐쇄되고 전남교구에 이르기까지 노회와 교구를 탈퇴했다. 따라서 전남교구 회의록 그 어디에도 남평교회 기록은 없다. 해방이후 1946년에 이르로 남평교회는 전남노회에 복구한다.

 

일제강점기 말에 남평교회는 신사참배 반대로 예배당이 폐쇄됐다. 이때 대구에서 사과농장을 경영하며 평신도 부흥강사인 모리후지 여사가 폐쇄된 남평교회 문을 열고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당시 평신도 부흥강사인 모리후지 여사는 영산포교회, 함평읍교회, 남평교회 등 여러 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으며, 이때 정규오 씨가 모리후지 여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1945년 9월 조선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계속)

소재열 목사, <한국장로교회 역사 스페셜>, 근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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