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인 신앙동지회 박종삼(朴種森)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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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기사입력 2021-01-23 [18:15]

 

  

 (리폼드뉴스) 한국장로교회는 설립 초기로부터 끊임없이 자유주의신학, 현대신학으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그때마다 잘못된 신학과 신앙으로부터 교회와 교단총회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지도자들이 있었다.

 

해방 이후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신학논쟁이 있었다. 성경적인 신학, 정통개혁신학으로 한국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을 갖고 있고 일어섰던 그룹이 바로 51인 신앙동지회였다.

 

51인 신앙동지회 회원 대부분은 조선신학교를 나와 부산고려신학교를 거쳐 1948년에 남산장로회신학교 제1회로 졸업했다.

 

그러나 박종삼 목사는 이미 1947년에 조선신학교를 졸업하였지만 51인 신앙동지회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여 한국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지키며, 신학교의 보수와 계승에 앞장섰다.

 

▲ 제33회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 위한 대구를 방문한 신앙동지회 회원(대구 팔봉산, 원 안이 박종삼 목사), 뒷줄 왼쪽부터 이노수, 엄두섭, 강용서, 이치복, 차남진, 앞줄 왼쪽부터 손치호, 정규오, 이성권, 박종삼, 최윤조). 이성권 목사는 평양에서 단신으로 내려와 신앙동지회와 함께 하다가 고려신학교 기숙사에서 소천, 부모 참석 없이 신앙동지회가 장사 지냄.  © 리폼드뉴스

▲ 필자가 남평교회 목회시절 신앙동지회 회원인 엄두섭 목사가 보내온 친필 편지, 엄두섭 목사가 당시 남평교회 시무때 1950년 6.25전쟁을 맞이한다. 당시 엄두섭 목사의 전쟁일기가 있는데 그 원본이 필자에게 있다. 당시 광주전남지역, 나주지역의 상황이 일자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리폼드뉴스

 

1901년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해 9월에 평양신학교를 폐고했다. 1939년 3월에 조선신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고, 그해 9월 제28회 총회에서 조선신학원 설립을 허락했다. 1940년4월 11년에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원이 개강되었다(제1대 학장 김대현 장로).

 

1946년 6월 12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 결의로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지정했다. 1947년 7월에 조선신학교가 대학 인가를 받았으며, 그해 10월 14일에 박형룡 박사가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48년 5월 20일에 총회 신학대책위원회에서 장로회신학교 설립이 가결되었으며, 6월 9일에 장로회신학교가 개교되었다(교장 박형룡 박사). 다음해인 1949년 4월 19일에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개최된 제35회 총회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허락되었다.

 

▲ 조선신학교(1945년)  © 리폼드뉴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총회 직영신학교가 되었다. 총회는 두 개의 신학교를 운영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36회 총회(1950년 4월)에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에 대해 직영을 취소했다. 두 신학교를 취소하고 대신 총회신학교(일명 총신)를 총회직영신학교로 설립했다.

 

박종삼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선신학교를 총회직영신학교로 운영할 당시인 1947년에 조선학교를 졸업했다.   

 

이상촌(理想村)』 표지  © 리폼드뉴스

 박종삼 목사가 졸업한 해인 1947410일 경건회 시간에 학생 중에 이일선 전도사가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봉안이상촌(奉安理想村)을 방문하고 난 후 기행문 형태로 이상(理想)한 농촌을 그리기 위하여 쓴 이상촌(理想村)이라는 소책자를 학생들에게 배부했다.

 

이일선은 이 책에서 여름 농번기에는 예배시간을 새벽과 밤으로 정하고 낮에 부득이 한 일을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책을 김재준 교수가 추천서를 써주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는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며, 평소 강의를 통한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을 정리하여 일주일 후인 1947416일에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33회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총회를 이를 받아들였다.

 

51인 신앙동지회는 제33회 총회(1947)에 진정서를 제출함으로 구체화 되었다. 박종삼 목사는 그해에 졸업자였으나 51인 신앙동지회와 뜻을 같이 하여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대구에서 개최된 총회에 진정서를 가지고 방문할 때 참여했다(이노수, 엄두섭, 강용서, 이치복, 차남진, 손치호, 정규오, 이성권, 박종삼, 최윤조).

 

▲ 제33회 총회에 제출한 진정서 원본  © 리폼드뉴스

 

박종삼 목사는 51인 신앙동지회는 194879일 남산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했지만 이미 51인 신앙동지회가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1년 먼저 졸업했다.

 

조선신학교는 1942년에 제1회 졸업생은 11명이었다. 6회 졸업식은 27명이었. 이때 박종삼 목사가 졸업을 했다(한신대학교 50년사, 부록 497). 당시 함께 졸업한 인사는 문익환 목사, 지원용 목사였다. 박종삼 목사는 당시 총회 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하였지만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지 않고 신앙동지회와 함께 정통보수신학의 길을 택했다.

 

▲ 조선신학교에서 나와 부산 교려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노량진에서 51인 신앙동지회(회원 결혼식)  © 리폼드뉴스

 

박종삼 목사는 51인 신앙동지회의 출발부터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며, 모든 회원 명단에 박종삼 목사의 이름이 올라있다. 박종삼 목사는 조선신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제33회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할 때 함께 동참했다.

 

그리고 신앙동지회가 조선신학교를 떠나 노량진에서 집단생활을 할 때나 19471115일 부산에서 신앙동지회를 조직할 당시 발표한 58명 명단에도 포함되었다(소재열, 박사학위 논문,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신학과의 투쟁참조).

 

▲ 박종삼 목사 동지회 회원명단(1953년 7월 24일) 경북 경산군 자인면 자인교회  © 리폼드뉴스

 

33회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할 때 소속 노회를 명시했다. 박종삼 목사는 경북노회 소속으로 이름을 올렸다. 박종삼 목사는 경북노회 소속으로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후 경북노회 칠곡시찰인 약목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51215일에 위임식을 거행했다(약목교회 교회 발자취 참조, 경북노회 105년사, 142면 참조).

  

박종삼 목사는 약목교회를 사임하고 1953년에는 당시 경북 경산군 자인면 자인교회에 시무하게 되었다(1953724일 나주 남평교회에서 개최된 제2회 신앙동지회 하기수련회 회원 명단 참조).

 

특히 박종삼 목사를 비롯한 51인 신앙동지회는 광주전남지역의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고 계승하기 위하여 광주신학교(광신대학교 전신)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필자가 집필한 부분인 광신대학교 50년사초기역사 참조).

 

▲ 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 기공예배(1972. 5.) 당시 교장은 박종삼 목사였다. © 리폼드뉴스

 

박종삼 목사는 경북노회에서 전남노회로 이명하여 광주 전남지역의 신학의 보수와 계승을 위한 그의 역할은 오늘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를 있게 하는데 일익을 감당했다(『광신대학교 50년사』 참조).

 

박 목사는 1955년에 광주신학교(야간, 광신대학교 전신) 교장(제3대)과 1956년에 이사장(제3대)이 되었다. 또한 1966. 3. 6-1982. 12. 31. 광주신학교(야간, 광신대학교 전신) 교장직을 맡아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앞장섰다.

 

박종삼 목사는 정규오 목사와 함께 51인 신앙동지회를 이끌면서 한국장로교회를 지켜왔던 그 공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그 시대의 선각자였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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