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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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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기사입력 2020-02-15

 

(이 글은 故 박형룡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본주의이다. 교회는 인간 중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의 타락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다시금 신본주의로 돌아가야 하고, 성경의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 박형룡 박사의 이 논문은 우리에게 다시금 신본주의 사상을 깨우쳐 준다.)

 

종교란 무엇이냐? 종교의 정의는 그 수가 무한히 증거할 수 있다. 로이바씨가 그 소저 「종교의 심리적 연구」에서 48종류의 각기 다른 정의를 수집한 것쯤은 그리 광범위한 수집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종교의 정의든지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관념을 제외하고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종교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요 그 어느 한 요인이든지 흠결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만 계시고 사람이 없어도 종교는 성립될 수 없고 사람만 있고 하나님이 안 계셔도 종교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의 이 양대 요인 중 어느 것이 본위인가? 하나님이 본위인가? 사람이 본위인가? 하나님이 중심인가? 사람이 중심인가? 이 문제의 답안으로는 혹은 사람 본위로 혹은 하나님 본위로 양설이 대립하여 서로 우월함을 다투고 있다. 이 대립한 양설을 나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라는 문구로써 표시하려 한다.

 

신본주의는 모든 지혜와 권능과 영광과 유익을 다 하나님께로 돌리지만 인본주의는 이 모든 것을 다 사람에게로 돌린다. 양편의 주장이 다 각각 그 근거를 가졌으므로 그 승부는 즉시 결정지을 것이 못되는 듯 하나 그 시비 판단에 있어서 적어도 예비적 구별을 밝혀 주는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신본주의는 성경에 본거를 두었고 인본주의는 인생의 꾀에 본거를 두었다는 것이다.

 

행 4:19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는 말씀이 있고, 갈 1:10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한 말씀도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구제 시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보이기를 힘쓰라(마 6-)고 말씀하셨고 육만을 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할 바 아니요, 영육을 함께 멸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또한 고전 2:4-5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런 말씀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경외, 순종할 것,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 사람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권능에 의뢰할 것 등을 역설하는 점에서 인본주의를 배제하고 신본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몇 개 구절의 독특한 주장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보편적 주장인 것이다. 인본주의의 논리적 근거는 적지 않게 매력적인 것이다. 종교의 주체가 누구냐 하면 사람이요 신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없다면 종교는 신앙되며 경험될 수 없는데서 사람을 종교의 본위로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고 할 것이다. 즉 사람을 척도와 표준으로 삼아 종교를 논하며 실행함이 옳지 않으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내시고 종교를 시설하셨다고 한다. 따라서 영광은 세세에 주께 있다고 한다.

 

성경을 유일의 근거로 한 기독교는 본래 신본주의요, 인본주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가 연장되는 동안 인생의 교만과 욕심은 종교의 인본주의를 불러들임에 이르렀고 이 말폐적 사상은 또한 기독교내에도 만정되어 마침내 신본주의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에 소씨너쓰를 원조로 한 유니테리안 운동, 19세기 불란서의 실증론자 어거스트 꽁트의 인본종교의 주창, 동세기의 슐라이어마허와 릿출의 선도로 발단하여 오늘날에 미칠 듯 날뛰는 자유적의 신학운동 이 모두가 기독교에 인본주의를 가지고 들어오려는 노력이었고 또 사실상 영향을 미친 바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역대의 교회는 성경을 따라 신본주의의 신앙을 확집하여 항상 인본주의를 배척한 것이다. 또한 성경대로 믿는 정통신자는 항상 신본주의를 확실히 잡고 인본주의를 배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사람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권능에 의뢰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의 교훈대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의 안목에 옳게 보이기를 힘쓸 것이다.

 

(1) 종교가 무엇이냐?

 

인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의 태두 릿출의 어법대로 종교는 사람대 사람, 혹은 사람대 세계의 관계라고 한다. 즉 종교는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선을 행하고, 또한 사람이 세계의 고악에 대할 때 낙관적 태도를 취하는 말하자면 인륜 도덕과 안심입명의 생활이라고 한다. 그리고 종교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계인지를 논함에는 유야무야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혹은 그것은 오직 제2차적 요소뿐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신본주의를 말하며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함을 종교라고 가르쳤다.

 

성경 전부에 역연히 묘사된 종교는 근본적으로 사람대 하나님의 관계인 것이다. 물론 사람에 대한 도덕적 의무와 세계를 극복하는 안심입명의 생활을 제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또한 하나님의 은사로 말미암아 수여되는 바와 결과적 행위라고 한다. 성경에서 종교의 정의라고 흔히 지적되는 바의 미가 6:8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다.

 

이 정의는 종교에 인륜을 포함시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요청이라는 것을 전제로 삼았다.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어 거대한 비용을 내는 것을 보고 그것을 차라리 빈민구제에 씀이 더 유용한 일이 아니냐고 힐난한 가룟 유다의 태도와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에는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대립이 완연히 보인다. 그런데 예수는 빈민구제보다도 자기에 대한 예배의 시급함을 역설하여 신본주의를 옹호하신 것이다. (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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