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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진 목사 향년 97세로 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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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기사입력 2020-06-20

 

 고 조동진 목사 © 리폼드뉴스

조동진 목사가 619일 오전 940분경 향년 97세로 소천했다.

빈소는 서울시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 3호실에 마련됐다.

 

조동진 목사는 1924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조덕천이다.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에즈베리신학교대학원(석사), 미국윌리엄캐리대학교 대학원(박사)을 졸업했다.

 

후암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선교사로 헌신, 후에 국제선교협력기구(KIM)와 동서선교연구개발원(EWC)을 설립했다. 아시아선교협의회(AMA)를 창립하고 초대 사무총장과 회장으로 섬겼으며, 3세계선교협의회(EWC)의 창립 회장으로 섬겼다.

 

김일성종합대학교 종교학과 초빙교수, 평양신학원 초빙교수 등으로 평화통일과 민족교회 운동에 힘썼으며 말년에 조동진선교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입관예배는 620일 오후 4. 발인예배는 622일 오전 8시에 거행한다. 장지는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월문리 가족 묘지이다.

 

조동진 목사는 암울했던 해방 이후 박형룡 박사와  함께 장로교회의 정통신학을 지킨 지도자였다.

 

1946년 조선신학교내에서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한 신앙동지들의 모임을 만들어 그 부당성을 총회에 진정서로 제출하였다. 그 진정서에 서명한 학생들이 51명이었다. 그래서 ‘51인 신앙동지회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신앙동지회라는 명칭으로 체계화된 시기는 51인 신앙동지들이 박형룡을 따라 부산 고려신학교에 편입한(19471014) 이후인 19471125일이었다. 이날 정식 신앙동지회가 조직되고 정관이 통과되었다. 이미 1946년부터 ‘51인 신앙동지회라는 명칭과 함께 서울 조선신학교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으로 불리어졌다. 특히대한예수교 장로회 제33회 총회(1948) 진정서에는 51인의 서명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51인이 조선신학교를 자퇴하고 나올 때 조동진이 함께 나와 적극적으로 뜻을 같이 했기에 이때로부터 52인 신앙동지회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조선신학교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문제는 총회적 문제로 확대되었고, 이 같은 일들은 당시 조선신학교의 교장인 송창근과 신학부 교수였던 김재준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교장이었던 송창근은 학내에서 일어난 신학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51인 신앙동지회들은 정치적으로 해결할 사항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미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일 것 같으면 해결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동지회 회원들은 교회에서 장로의 신분으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신학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의지는 당시 조동진을 포섭하려는 일련의 사건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조군 어느 편인가?”

나도 군의 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침묵만 지켜주게.”(腐心, “호남선 열차”, 불기둥5(1948. 8. 25), 24.)

 

그러나 조동진은 이러한 송창근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침묵이라고요? 벌써 오랜 침묵을 깨뜨릴 때인 줄 아는데요.”

 

학생들은 교수들과의 개인적인 관계보다도 더 크게 본 것은 신학의 좌경화의 위험성이었다. 조동진은 나는 그들을 존경 하였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나를 사랑으로 대하여 주기도 하였다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달콤한 데에 언제까지나 취하여 있을 수 없었다라고 말하면서 학교를 나올 수밖에 없었던 심경을 당시불기둥회보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

 

다음 글은 신앙동지회 총무였던 조동진의 글이다(신앙동지회 회보, 1948. 7. 1).

 

다시금 말한다! 오늘날 조선교회가 사모하는 신학자 그는 과연 진실로 성경에 살고 기도에 살며 성경을 천계(天啓)의 말씀으로 믿고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그 안에서 약동하는 사람이다.

 

개혁의 거성 루터는 말하기를우리는 연구 혹은 지력으로서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너희가 먼저 할 것은 기도뿐이다. 하나님의 대자비를 힘입어 거룩한 말씀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간절히 원할 것 밖에 없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자는 그 말씀의 계시자인 하나님 밖에는 없다.

 

아무런 자기의 수고와 자기 스스로의 이해에 의뢰치 말고 전연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의 감화만을 의지하라. 이 사실을 현실로 체험한 사람 중의 하나인 나의 말을 믿으라’(의역)고 하였다. 우리는 다 같이 이러한 참된 신학자를 사모하며 우리도 또한 스스로 우리의 사모하는 신학자 되기에 노력하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신학자여 이 땅 위에서 영원히 물러가라. 속화된 인본주의 신학자여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라.

 

나의사모하는 말씀의 신학자여 나오라! 신학적 위기에 처한 조선교회는 부른다.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체득한 참 신학자여 나오라! 그리하여 어두운 이 땅 위에 불기둥이 되어 흩어진 양 무리를 우리 안에 가두고 이리와 도둑으로 더불어 싸워다오.

 

참된 신학자를 갈망하면서 자신들이 바로 참된 신학자가 되자고 호소하면서 거짓 신학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신학자이 땅 위에서 영원히 물러가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면서 속화된 인본주의 신학자여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당시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보수신학을 지키기 위한 조선교회가 그토록 사모하는 참 신학자를 갈망하고 있다.

 

나의 사모하는 말씀의 신학자여 나오라! 신학적 위기에 처한 조선교회는 부른다(조동진, “신학적 위기에 처하여 사모되는 참 신학자”,불기둥4(신앙동지회 회보, 1948. 7. 1), 23-24.).

 

필자는 2005226() 오후2시 조동진 박사의 사택(의왕시)을 방문할 때 신앙동지회 불기둥에 부심이란 필명으로 기고한 분은 조동진 박사였음을 확인했다. 조동진 목사는 총회 51인 진정서 서명에는 빠져 있다. 그러나 51인이 조선신학교를 자퇴하고 나올 때 함께 51인과 뜻을 같이 하여 자퇴하고 나왔다. 총회 진정서 사건이후 신앙동지회를 이야기할 때는 조동진 목사를 포함해서 52인이라고 한다.

 

당시 필자가 몸담고 있었던 남평교회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다.

 

남평교회에서(200533) 교회 설립 105주년 기념 및 호남지역 교회사 학술 세미나와 19537월 남평교회에서 모인 신앙동지회 제2회 수양회에서 복음주의 협회가 조직되었기에 이를 기념해서 신앙동지회의 한국복음주의협회” 52주년 기념석을 세울 때 조동진 목사가 필자에게 보내온 글은 다음과 같다.

 

일자 : 2005222

수신 : 남평교회 소재열 목사

제목 : 남평교회 105주년 설립기념 및 복음주의협회 조직 52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 개최에 대한 경축의 글

 

경애하는 남평교회 당회장 소재열 목사님께.

귀 교회가 33일에 창립 105주년 및 복음주의협회(N.A.E.) 조직 52주년 기념 호남지역 교회사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 소식을 기독신문을 통하여 읽고 감사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경하의 글을 드립니다.

 

저는 신앙동지회 창립 52인 중 한 사람으로 신앙동지회의 기관지 불기둥의 편집인으로 봉사한 작은 종이며 19537월말 남평교회(당시 엄두섭 목사 시무)에서 개최된 신앙동지회의 여름수양회석상에서 한국복음주의협회(N.A.E.)’ 조직을 위해 앞장섰다가 초대총무로 선출되어 1957년까지 봉사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지금은 81세의 늙은 종으로 여러 후학들의 충성스러운 사역을 역사의 뒷마당에서 바라보며 위하여 기도하면서 선교학 연구와 집필을 통해 한국교회 세계선교의 앞날을 위한 문헌과 자료를 남기는 일을 위하여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귀 학술 세미나가 한국교회 특히 호남지역의 교회의 광활한 발전과 도약에 큰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을 바라면서 거듭 경하의 뜻을 표합니다.

 

조동진 박사는 본 교단의 정통보수신학과 신앙, 그리고 선교와 영성으로 충만한 한 시대 교단총회의 등불과 같은 지도자였다.

 

소재열 목사/ 리폼드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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