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와 총신대, 교권을 위한 정체성 vs 정체성을 위한 교권

가 -가 +

소재열
기사입력 2021-02-28 [02:41]

 

▲제27회 총회(1938년) 신사참배 결의를 하자 평양신학교는 그해 스스로 폐쇄시켰다. 마지막 신입생 환영 야유회(1938년 4월 28일)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전도와 교회설립, 치리회 조직 등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탄생되었다. 공의회 시대에 치리회 제도를 학습한 후 1907년에 우리나라에 최초로 노회가 설립되었다. 노회 설립의 기초가 되는 성경적, 신학적 입장은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합동)에 규정된 내용과 같다.

 

이 땅에 교회설립 17주년이 되는 해인 1901년 5월 15일에 평양에서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어 공식적으로 교역자 양성이 시작되었다. 10여 명이 참여한 교수들의 신학은 보수적이었으며, 청교도적 신학을 견지하였다. 이들은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아주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한 이들이었다. 

 

▲ 평양신학교가 설립된 해의 장로회 공의회(1901년)  © 리폼드뉴스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재한 4개 선교부의 대표로 구성된 ‘장로교위원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1907년 마포삼열 선교사가 초대 교장으로 선출되어 1924년까지 봉직하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신학적 기초를 닦아 놓았다. 

 

제정민법 이전 일제치하에서 ‘조선민사령’은 1911년 3월 25일 총독부법률 제30호로 제정된 ‘조선에시행할법령에관한건’에 근거하여 교회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진행되었다.

 

▲재27회 총회(1938) 신사참배 결의 당시 총회임원들(앞줄 좌로부터 서기 곽진근 목사 홍택기 목사(중앙), 김길창 목사   ©리폼드뉴스

 

종교단체가 재단법인을 설립하여 관리할 경우, 총독부는 종교단체의 재산에 관한 관리감독을 통하여 종교단체를 통제하고 규제할 수 있었다. 장로교회는 총독부에 덜 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가톨릭교회보다(1920. 5. 8.), 감리교보다(1920. 12. 18.), 불교보다(1922. 12. 30.)보다 늦게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3회 총회(1924.9.13.)에서 평양신학교 보고에서 마포삼열 선교사가 교장직에서 사임하고 원로교장으로 임명했다고 보고했다. 후임교장으로 라부엘 선교사를 임명했다고 보고했다. 제14회 총회에서는 “본교 재단법인 인가를 엇은[얻은] 일이오며"라고 신학교육부 보고가 있었다. 이에 총회는 보고를 받았다.

 

▲평양신학교 신축(1922년)   ©리폼드뉴스

 

평양신학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재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유지재단’이 설립되었다. 평양신학교가 1922년에 신축한 교사를 재단법인에 등록하였다.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재단법인 재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유지재단’인 법인을 구성하여 운영하였으며, 마포삼열기념관 및 신학교 재산을 유지재단에 등록하여 관리하였다.

 

1934년은 자유주의신학과 현대신학의 파괴적인 고등비평적 성경관을 배격하며 선교 이래 교회 설립 50주년이 되는 희년의 해였다. 희년의 해에 자유주의 신학과의 충돌이 『신학지남』 권두언 사건으로 촉발되었다. 당시 편집장은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 남궁혁 박사였다. 편집간사는 김재준 목사, 박형룡 박사는 편집위원이었다.

 

▲ 1925년 평양장로회신학교 한국인 최초 교수로 부임한 남궁혁 목사(뒷줄 오른쪽), 앞줄 왼쪽부터 마포삼열, 이눌서 교수, 뒷줄 왼쪽 김인준   ©리폼드뉴스

 

김재준 목사는 1934년 『신학지남』 권두언을 통해 신학은 지금까지의 보수 신앙을 맹종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한국적인 신앙, 다시 말해 선교사와의 관련을 떠나서 우리들의 새로운 신학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새로운 신학을 제창했다. 그는 “정통주의로 통조림 된 한국장로교회에 어딘가 숨 쉴 구멍을 틔워 줘야 하겠다”고 까지 말했다.

 

▲ 왼쪽부터 박형룡, 김재준, 남궁혁, 채필근 박사  © 리폼드뉴스

 

김양선은 “희년을 계기로 한국교회에 다른 한 한인 신학자 김재준에 의하여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 전통과 정통을 무시할 뿐 아니라 그것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는 언급은 맞았다. 이 땅의 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은 잠복기와 발아기, 성장기를 통해 누룩처럼 번졌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에 한글 사용을 전면 금지 시켰다. 1938년에 이르러서는 더 악랄했다. 제27회 총회(1938년)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토록 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 9. 10.)에서 신사참배가 결의되자 선교부는 10일 후인 9. 20.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자진하여 폐교했다. 그리고 다시 이 학교를 열지 않았다.

 

▲남산 장로교회신학교(교장 박형룡 박사) 제1회 졸업식 주보(1948. 7. 9.)   ©리폼드뉴스

 

선교사들이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폐쇄되었고 1940년 일제에 의해 선교사 전원이 강제 출국을 당했다. 이듬해인 1941년 12월 말에 ‘재단법인 재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유지재단’의 재산은 총독부 귀속재산이 되었다. 후평양신학교(교장 채필근)는 이같은 적산재산을 임대하여 신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후평양신학교는 이 적산이 되어 버린 평양신학교 재산을 매입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총회의 정체성이 비참하게 무너지자 신학교를 폐교한 것은 곧 유지재단 재산까지를 포기한 것을 의미했다.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로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의 정체성이 한순간에 무너졌다고 판단한 선교사들은 신학교 폐쇄로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은 이후 총회가 중심이 된 후평양신학교는 194029일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1940411일에 개교했다. 교장은 채필근이었으며, 전 평양신학교와 구분하기 위하여 이 신학교를 후 평양신학교라 부른다.

 

▲후평양신학교(교장 채필근) 제1회 졸업식(1941. 3. 12.) 강단에 일장기가 걸려있다.  ©리폼드뉴스

 

후평양신학교는 적산재산이 된 전 평양신학교의 교사를 매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4년째의 해인 1942년 제31회 총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폐쇄시켰다. 특히 일본어로 기록된 1942년 제31회 총회 회의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후평신학교가 평양신학교 교사를 현재 사용하고 있지만,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여전히 적산으로서 당국에서는 적산관리에 편의를 위해서 빨리 이것을 처분할 것을 승낙한 고로 본교 이사회에서는 사무간사를 증선하여 반도 각 교회에 있는 총회부담의 기본금 및 개인 독지가의 헌금 등을 빨리 모아서 좋은 시기를 놓치지 않고 이것을 매수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음. 교역자 및 신도들은 이것에 적극적으로 원조해 주실 것을 바람.”(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1회 회의록)

 

총회와 총신대학교가 신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총신대학교의 학교법인을 포기할 수 있을까? 포기할 수 없다면 총회와 총신대학교의 정체성은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 해방 후 제1946년 남부대회(총회)로 모였지만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총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제33회 총회(총회장 이자익 목사, 1947. 4. 16.-22) 아자익 총회장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 리폼드뉴스

 

본 교단 직영신학교인 총회신학교는 1955년 남산에 있을 때에 각종학교(各鐘學校)로 인가를 받았다. 인가받은 각종학교는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연동측인 통합측이 이탈해 간 후 1959년 10월에 연동측 인사들에 의해 학교명을 “장로회신학교”로 변경하여 이 신학교에 귀속시켜 버렸다. 이렇게 되자 승동측인 합동측의 총회신학교는 무인가신학교가 되어 버렸다.

 

총회신학교 이사회는 1967년 5월 4일 정부로부터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문교대 1042.1-972호)을 인가받았다. 이어서 한 달 후인 6월 3일에 문교부로부터 대학령에 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초대 이사장에는 사당동 학교부지 18,000여 평을 기증한 부산 부전교회 시무장로인 백남조 장로가 선임되어 취임했다.

 

제45회 총회(960.12.. 13.)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고신측과 합동하여 합동측이 되었다(사진은 승동교회에서 합동기념)  © 리폼드뉴스

 

이렇게 하여 총회신학원은 학교법인 이사회 15명, 각 노회가 파송한 32명으로 구성한 전체이사회, 법인 이사회와 전체이사회 이사들을 중심으로 한 21명의 실행이사회를 구성하여 학교를 운영했다.

 

총신대학교는 재단법인으로 설립인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학교법인으로 인가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학교법인이라 하지 않고 재단법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 총신대, 1969년 가을 사당동 초창기 총신의 원로교수들과 함께 서 있는 박형룡 학장(위 사진 윗줄 왼쪽부터 안용준, 이상근, 박윤선, 박형룡, 명신홍).     ©리폼드뉴스

 

총회와 신학교를 지켜내기 위한 투쟁의 역사는 곧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한 역사였다.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총회와 총신대학교는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총회 선배들은 이를 지켜내기 위해 모진 비바람의 폭풍우를 견디어 내면서 총회와 신학교를 지켜냈다.

  

총회와 직영신학교의 정체성이 무너질 때 분연히 일어났던 해방 후 조선신학교 안에서의 신학생들의 저항은 현재 본 교단의 정체성이 유지되도록 했다. 그리고 70년대 80년대 학교를 지켜내기 위한 신학생들의 저항, 1978년 신학교가 좌경화되어간다는 모함에 총신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오늘의 총회와 총신이 되게 했다.

 

▲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제93회 총회가 제92회 총회장인 김용실 목사의 사회로 개회됐다. 제93회 총회장으로 최병남 목사가 총회장이 되었다.  © 리폼드뉴스

 

2021년 5월 15일은 총신 120주년을 맞이한다. 120주년을 전후한 총신은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한 총신대 사태가 일어났다. 이 정체성 회복운동은 제93회 총회(2008년)부터 움트기 시작했다. 이때로부터 총회와 총신의 두 세력 간의 교권 투쟁은 법정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08년부터 시작된 두 세력 간의 교권 투쟁은 총신대학교의 임시이사 체제라는 결과를 낳았다(리폼드뉴스 검색 창에 ‘이사회’를 입력하여 13년 동안 기사 참조). 13년 만인 2021년에 총회와 총신대학교 정상화가 완료되는 듯했다. 그러나 2008년으로 회귀되는 듯한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다. 총회와 총신의 또 다른 정체성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총신대학교 사태가 교육부의 실태조사로 이어지게 됐다. 교육부는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총신대학교(총신대학교)에 대해 2018. 3. 20(화)~2018. 3. 23(금)까지 실태조사위원이 실사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총궐기집회에 참석한 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이 정체성 논란은 2008년부터 시작된 두 세력 간의 충돌과 같은 양상이다. 관할청인 교육부와 정상화를 추진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에서 정이사 3인을 외부 인사로 선임했다. 이는 여성과 반여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총회와 총신대의 법인 정관에 명시된 정체성 훼손이 문제가 된 사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안수를 찬성합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힌 인사가 총신대 정이사로 선임됐다. 총회의 신학적 입장에 찬성하며 선서로 목사 임직을 받았다. 그런데 그 선서의 진정성이 무너졌다. 총회의 신학적 입장에 반한 인사가 총회의 직영신학교를 운영하는 이사가 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제104회 총회장인 김종준 목사가 제105회 총회(2019) 총회장인 소강석 목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헌법대로 의사봉을 사용하도록 성경, 헌법, 의사봉을 인계하고 있다.    ©리폼드뉴스

 

총신대학교의 설립목적과 정관에 규정된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훼손할 수 있는가? 이제 총회는 국가의 권력기관인 교육부와 총회 내 두 세력 간 교권의 정체성 논쟁을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총회와 총신은 큰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현 총회 집행부는 이를 어떻게 봉합하고 하나된 총회, 총신을 이끌어 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럴 때에 제105회 총회 총회장 소강석 목사가 참모진들과 어떤 리더십을 보일지가 주목된다. (*)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법학박사)

소재열의 다른기사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텔레그램 URL복사
URL 복사
x

PC버전 맨위로 갱신

Copyright ⓒ 리폼드뉴스. All rights reserved.